규범적 예언 안에서 불안을 느끼던 보.
보를 불안에 가둔 것은 무엇일까. '물과 항상 먹어야 한다'는 지침, 늦잠을 허락않는 비행기의 예정된 일정이라는 예언 안에서 오히려 불안을 느끼지 않았나. 한편 영화 시작 처음으로 관객이 안락하게 느끼던 연극 나레이션 씬. 불안에 쫓기던 그가 사실은 우리가 아는 구조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는 것이라 밝히려는 듯 영화가 연극씬에서 보와 관객을 속이고 있을 때 오히려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매번 아는 그 스토리의 구조 속에서야.
하지만 이 안정감은 역설적으로 아들과 가족을 이룰 것이란 예언이 실행되지 못했을 때의 불안을 다시 극대화한다.
보는 반복되는 꿈을 꾼다. 욕조의 꿈은 '아버지'를 찾던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꾸는 꿈인 것이 밝혀진다. 보가 엄마에게 했던 질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버지의 자리는 잃어버린 보의 욕구이다.
정상가족에 대체되어 들어가고 싶은 보의 바람은 보 자신이 두려워하던 침범을 자신이 행하게 하기도 한다. 자신의 방을 모르는 이들이 점거하는 것을 경찰 앞에 범인이 되어 맞딱뜨릴 위기보다 더 두려워하는 만큼 보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한다. 그러나 곧 그런 보는 로저-그레이스의 4인 정상가족 속 아들의 자리도 토니의 방도 점거하게 된다. 이런 침범을 죄로 느끼는 모습은 거실로 나가 방을 재양보하거나 토니에 대한 태도에서 보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토니를 죽음으로 몰기까지 하며 그의 억눌린 정상가족 욕구로 벌어진 상황으로 그의 죄책감은 부푼다.
모니터에 게워내던 장면, 피우는 약에 취해서야 일레인과의 만남을 떠올리는 모습을 통해 그가 억눌러온 욕구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사실을 회피하려고 내세운 엄마의 거짓이 마치 그에게 경전이 되어 그의 인생 내내 욕구불만의 상태로,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세운다.
엄마의 죽음(이라고 알고있는 상태)에서도 예언은 여전히 보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베드씬 속 두려운 얼굴과 일레인의 죽음으로 발현된다. 그의 억눌린 성욕구 대신 형벌을 받은 일레인을 보며 그의 죄책감은 다시.
계시로 인해 그의 본성은 평생 억눌려왔고.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려하는 순간 죄책감이라는 채찍이 - "옳은 일을 하라"는 말만으로 컨트롤하듯 - 자기 손에 들려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검열하게 만든다.
예정이란 것이 공포를 만드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 원형적 이야기의 수많은 변형들이 우리를 충만케 하지만 동시에 오히려 우리를 가두고, 또 그 세계관과 동떨어진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불안이 되어 삶을 장악해버린다. 타야했지만 탈 수 없을지도 모르던 비행기 티켓이 만드는 그 괴리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신의 손길을 거친 서사구조를 받아들일것인가. 어떠한 새로운 구조가 우리에게 서사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우리의 기반이고 뿌리로 존재한 것에 대한 거부는 역시 죄책감을 수반하는 것을 포함해 자기 실존에 대한 확신까지 흔든다. 과거의 바탕에 근거한 존재이기에 결국 유전을 벗어나려한 나에 대한 변호는 무용하다. 정말 그것을 부정하면 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존재하지 못한 듯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런 불안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예정된 존재가 되지 못하고 다시 사라질 수 밖에 없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에선 필연을 넘어선 우연이라도 그 불안한 비계획성에서 기반을 고칠 수 있지않을까? ..
또 이는 다른 시간선에서는 정해져있는 듯한 예언과 운명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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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에선 내내 불안에 시달리는 보를 보여주다가 끝내 엄마의 설계 안에 있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마치 영화가 시작될 때 영화의 세계를 만나는 관객이 영화의 시간에 잉태되어 스크린의 빛에 감응하기 시작하고, 우리는 영화가 재생되는 관객석에 앉아 - 보가 엄마의 아래에 있듯이 - 영화의 영향 아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가, 보가 다시 물 속으로 사라질 때 영화관을 떠나게 되고 그 정신의 여정에서 해방되듯이.